Word of Mind

재즈 싱어 레이디 가가에 훅 가다 본문

Jazz

재즈 싱어 레이디 가가에 훅 가다

vision2real 2015.02.13 17:29

American Top 40와 함께 듣기 시작했던 미국 팝 음악


나는 케이시 케이슴(Casey Kasem)이 진행하던 어메리칸 탑 포티(American Top 40)를 듣고 자란 세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워낙 어릴 때부터 미국 팝음악을 듣고 자란 탓에 미국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중학교 2학년부터 3년여간 거의 매주 무려 4시간 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째로 모두 120분짜리 카세트 테이프 2개에 녹음해서 Billboard Hot 100 차트의 40위부터 1위까지 순위를 받아 적으며 즐겨 듣던 말그대로 매니악(Maniac)이었다. 지금 내가 그닥 영어 실력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중고생 시절에 저런 음악 방송을 받아 적으며 보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주한미군 방송이었던 AFKN(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을 통해 토요일은 FM으로 오후 2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요일엔 AM으로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재방송을 했었다. "I'm Casey Kasem"이라고 말하던 특유의 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미국 Billboard Hot 100 차트 위주로 최신 음악을 찾아 듣다보니 1~40위까지의 아티스트와 곡명을 내가 제대로 받아 적었는지 맞춰 볼 차트가 필요했다. 그게 뭐라고... 그래서, 당시 유일하게 Hot 100 차트와 주요 차트를 매월 신속하게 제공하던(지금 생각해 보니 무단 게재로 생각됨) 팝송 전문잡지 "월간팝송(폐간됨)"을 구독하게 됐는데,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쉽게 해외 팝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데다 음악적으로도 폐쇄적이었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이 잡지는 레벨이 상당히 높았다. 월간팝송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재즈(Jazz), 퓨젼(Jazz Fusion),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까지도 깊게 다루었다. 그래서 처음 이 잡지 내용이 어려워서 차트 밖에는 딱히 볼 내용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잡지를 탐독하던 어느 시점부터는 자연스레 하드 록(Hard Rock), 헤비 메탈(Heavy Metal),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 재즈 등으로 차트와 상관 없이 듣는 영역이 넓어졌고, 좋다는 음악들을 이것저것 여러 쟝르 찾아 듣다 결국 재즈와 퓨젼으로 음악적 성향이 정해졌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는 쟝르와 상관 없이 음악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재즈와 퓨젼을 위주로 듣는 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후 가요나 팝을 거의 듣지 않았다. 가요나 팝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떤 음악이 내게 맞는지 다른 쟝르의 음악들을 들어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80년대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재즈에 심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90년대 초 이후의 팝은 웬만큼 유명하지 않고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한다.



레이디 가가(Lady Gaga)라는 이름을 내가 알다니!


내가 팝으로 시작해서 여러 쟝르의 음악을 들어보다 재즈와 퓨젼을 주로 듣게 된 이후에는 더 이상 팝을 찾아 듣지 않게 되어 비욘세(Beyonce)도 모르고 어셔(Usher)도 모른다. TV에서 회자되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본 적은 꽤 있지만, 제대로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레이디 가가(Lady Gaga)를 내가 안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다. 내가 레이디 가가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의 엽기적인 퍼포먼스와 돌출 발언들 때문이다. 투어 중에는 성적인 욕구 해결을 위해 밴드 멤버들과 잠자리를 함께 한다느니, 쇠고기로 만든 고기 옷을 입고 나타난다던지 하는 그녀의 다소 또라이 같은 행실(?)에 관한 기사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유일한 그녀의 히트곡은 "포커 페이스(Poker Face)" 뿐인데, 미국인 피겨 스케이터인 조니 위어(Johnny Weir)가 2009년 김연아의 아이스 쇼에서 공연 음악으로 사용한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참고로 나는 승냥이다). 내게 레이디 가가의 이미지는 히트곡이 좀 있는 또라이 댄스 가수다.


그러나, 며칠 전 우연히 레이디 가가의 공연을 보다 한방에 훅 간 계기가 있었는데, 완전히 반했다(I have been completely fascinated by her performance).



친절한 가가씨


사실,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작년 11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직접 봤을 때부터 호감으로 바뀐 터였다. 때마침 밀라노의 청담동, 몬테나폴레오네(Montenapoleone)를 지나던 여행자의 신분이었던 나는 비싸기로 악명이 높은 Park Hyatt Milano[각주:1]호텔 앞을 지나다가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 있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사람들에게 물어 본 결과 그게 레이디 가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레이디 가가가 마침 그 호텔에서 곧 체크아웃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또라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그녀에 대한 환상은 실물을 보자마자 곧 급호감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본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으로 친절했던 것이다!!!


차도는 물론 인도까지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던 Park Hyatt Milano 입구.


영화에서나 보던 로봇 같은 덩지의 보디 가드. 우람한 팔뚝에 수트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드디어, 우뢰와 같은 함성과 함께 등장한 조그만 레이디 가가.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일일이 펜스에 기대어 있는 팬들과 팬들의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혀(?) 주고 있었다.

여러 인종들과 관광객이 뒤섞인 위험한 곳이라 보디가드들은 초긴장인데도 느긋했던 레이디 가가

세계적인 스타답지 않던 담담함과 여유로움.

매섭다고 해야 할지 짜증이 났다고 해야 할지, 신경이 곤두설 대로 서 있는 보디가드.


그녀는 기다리던 사람들 앞으로 서슴없이 휘익 다가가더니 일일이 같이 사진도 찍어 주는 등 팬서비스가 아주 좋았다. 전혀 톱스타 같은 내색 없이 아주 스스럼없었다.



2015 그래미 어워드 (2015 Grammy Awards)


블로그를 통해 여러 번 밝혔지만, 나는 재즈 뮤지션 중에 칙 코리아(Chick Corea)를 가장 좋아해서 정말 많이 듣는다. 가끔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지만, 금방 질려 버리는 편이다. 칙 코리아가 이미 20개 이상의 그래미를 수상한 경력이 있어 수상 여부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으나, 지난 일요일에 열렸던 57회 그래미 어워드의 두 개 부문에 또 다시 후보로 올랐으니 기대해달라는 칙 코리아의 트윗이 계속 오기도 했고 2년 전 그래미에서는 직접 공연을 한 적도 있어서 이번엔 조금 관심이 갔다. 이날 칙 코리아는 재즈 솔로 연주(Best Improvised Jazz Solo)와 재즈 연주 앨범(Best Jazz Instrumental Album), 두 개 부문에서 모두 수상했다.


이번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마돈다(Madonna), 어셔(Usher), 비욘세(Beyonce), 게다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까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했다. 한 무대에서 이 사람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니, 정말 환상적인 드림팀 아닌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그래미 무대는 1991년 신인가수였던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가 "Vision of Love"을 열창하는 장면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날 가장 놀란 장면은 이거였다.



유튜브 동영상 재생에 문제가 있는 경우, 다른 동영상 보기


토니 베넷(Tony Bennett)은 미국 전통 팝과 재즈를 불러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대표적인 팝 스탠다드 가수인데, 이 분의 나이는 1926년 출생으로 만 88세고 한국 나이로는 무려 90세다. 아직도 정정한 건강 상태는 둘째치고 함께 노래를 부른 가수가 레이디 가가였다!!



재즈 앨범 낸 걸 몰랐네!!!


워낙 과장된 메이크업만 봐서 나는 레이디 가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 공연을 보는 순간 재즈 스탠다드를 해석하는 보컬과 무대 퍼포먼스가 너무 훌륭해서 이 레이디 가가가 그 레이디 가가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들은 Best Traditional Pop Vocal Album 부문에서 Cheek to Cheek(2014) 앨범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들이 미국 신세대들에게 미국의 훌륭한 전통 팝을 알려 주기 위해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이 앨범 제작으로 이어졌고 이런 성공을 불러 온 것이다. 이 앨범은 작년 9월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앨범 챠트(Billboard 200)와 재즈 앨범 차트 각 1위로 차트 랭크에 데뷔했다.


보통은 재즈를 연주곡 위주로 듣기 때문에 보컬 앨범은 그닥 선호하지 않는데 이 무대를 한 번 보고나니 앨범을 들어 볼 이유가 충분했다. 모두 16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빅 밴드(Big Band), 쿼르텟(Quartet - 기타, 피아노, 베이스, 드럼) 등 다양한 포맷으로 제작되었고, 재즈를 평소에 듣든 안 듣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훌륭한 팝 재즈 앨범이다. 


YouTube에는 이들의 앨범 녹음 장면을 담은 뮤직 비디오들과 라이브 공연 동영상이 꽤 많이 올라와 있는데, 정말 보는 내내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다. 그 동안 연주자들의 연주하는 장면에만 집중해서 보던 재즈 비디오가 싱어의 가벼운 무대 퍼포먼스만으로 이렇게 풍성해 보일 수 있다니! 보컬과 퍼포먼스가 훌륭한 건 말할 것도 없고, 60년이 넘는 나이 차를 가진 두 사람이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무대를 즐기고 있는지가 충분히 전해지는 것 같아 더 즐겁다. 도대체 아직 20대인 레이디 가가의 저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특히, PBS에서 방송되었던 라이브에서 토니 베넷이 레이디 가가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웃음을 살짝 터뜨리는 장면은 너무 행복해 보이신다. 그래미에서 무대를 접한 이후로 이 앨범을 계속 듣고 있는데, 연휴가 지나면 2015년 1월에 발매된 Cheek to Cheek - Live DVD를 구입해서 한동안 줄기차게 보게 될 것 같다. 


누군가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모자람은 사는 동안 고쳐지기는 할까?

우스꽝스러운 메이크업만으로 편견을 가졌던 레이디 가가의 새로운 매력에 훅 가 있다.


그래미에서의 의외의 모습에 놀란 가슴 쓸어 내리기도 전에, 곧 이어 2015. 2. 22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 50주년을 기념하여 쥴리 앤드류스(Julie Andrews)에 대한 트리뷰트로 영화에 나왔던 곡들을 메들리로 부른 레이디 가가의 공연을 또 보게 됐다. 쥴리 앤드류스조차 감동에 젖어 어쩔 줄 몰라하던 모습이 선하다.



젠장. 레이디 가가가 이제 노선을 완전히 바꾼 건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TripAdvisor에서 당시 밀라노의 428개 호텔 중 1위로 랭크되었던 유명한 곳입니다. [본문으로]
2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