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azz

일말의 경쟁이라고는 없었다. 모든 것이 영감을 주는 거였다.

"일말의 경쟁이라고는 없었다. 모든 것이 영감이었다 (There was never one hint of competition; it was all inspiration)."

 

살아 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의 팬이 된다.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여러 잡다한 것들이 있을 텐데, 스포츠나 음악, 게임 같은 게 그런 것들이다. 나는 게임은 그닥 즐기지 않는데 음악과 운동은 내 인생에서 뗄래야 뗄 수 없다. 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내가 프로페셔날하게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아마츄어로서는 남들보다 전문적으로, 광적으로 꽤 오랜동안 즐겨온 편이다. 그 중에서 재즈, 정확하게는 재즈의 그 감성은 내 취향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즉, 재즈는 생사와 직결된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재즈 애호가 중 클래식을 못 견뎌하는 부류가 있다면 아마도 재즈 특유의 리듬이나 텐션 코드들에 너무도 익숙해진 때문일 것이다. 클래식이 정직한 다이어토닉 코드(Diatonic Chord)의 감성이라면 재즈는 7th, 9th, ♭5, 11th, 13th 등 텐션을 많이 집어 넣는다. 재즈를 잘 모르는데도 어떤 음악을 듣고 재즈적인 느낌이 난다고 한다면 대부분 이와 같은 텐션과 블루 노트(Blue Note)들이 많이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화성의 취향도 내 삶에 사소하게나마 영향을 준다.

주로 클래식 교육을 받은 흑인들이 클래식 악기로 연주하던 재즈는 40년대부터 일렉트릭 악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점차 도입하는 과정에서 특히 당시 롹앤롤(Rock & Roll) 등의 팝에서 인기를 떨치고 있던 일렉트릭 기타를 이용한 여러 실험적인 시도가 있었다. 스윙에서 벗어나 롹(Rock) 리듬을 사용한다거나 라틴 리듬을 도입한다거나 하는 따위가 그런 것이다. 이른바 퓨젼(Fusion)의 탄생이다. 타 쟝르의 특징적인 부분을 섞어 보는 것이다. 롹(Rock) 리듬에 재즈의 화성을 얹는다든지, 재즈 화성에 라틴 리듬을 얹는다든지 등등 대부분이 일렉트릭 악기들이 발달하면서 촉발된 상황이다. 즉, 퓨젼 음악은 일렉트릭 장비가 촉발시켰다고 보면 된다.

재즈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라는 사람이 그 퓨젼이라는 장르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재즈와 퓨젼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그는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1926년에 미국 일리노이주 올튼(Alton, Illinois)에서 치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13세때부터 그의 아버지의 환자였던 엘우드 뷰캐넌(Elwood Buchanan)으로부터 자로 맞아가며 엄격한 트럼펫 교육을 받았다. 훗날, 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서전(Miles: The Autobiography by Miles Davis and Quincy Troupe (Sep 15, 1990, Simon & Schuster))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뷰캐넌을 꼽을 만큼 그를 존경했다.

그는 흑인임에도, 재즈 연주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클래식 교육의 메카인 줄리아드 음대(Juilliard School of Music)을 다닐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물론, 유럽 클래식 음악에 지나치게 편향된 백인 위주의 커리큘럼에 질려 1년만에 때려치긴 했지만, 줄리아드에서의 경험이 트럼펫 연주 테크닉을 향상시키고 이후 이론적인 토대를 세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어 주었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마일즈는 한국이 해방되던 1945년 가을, 줄리아드 음대를 떠난다. 줄리아드는 1905년 설립 이래로 거의 100년만인 2003년이 되어서야 재즈학부를 신설했으므로 재즈에 대한 정규교육은 받지 못한 셈이다.

그에 대한 이런 구차한 설명보다는 아래 이름들을 보시라.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칙 코리아(Chick Corea)
키스 쟈렛(Keith Jarett)
빌리 코밤(Billy Cobham)
웨인 쇼터(Wayne Shorter)
데이브 홀랜드(Dave Holland)
론 카터(Ron Carter)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존 맥라플린(John McLaughlin)
잭 디조넷(Jack DeJohnette)
래리 코렐(Larry Coryell)

재즈 팬이라면 위 이름들이 얼마나 중량감이 있는지 잘 알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당대의 최고의 거장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모두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밴드 출신이라는 사실. 원래 뛰어났기 때문에 멤버가 될 수도 있었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실험적인 도전과 영향을 이어 받아 스스로도 계속 혁신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물론, 서로 영향을 주었겠지만 대부분 마일즈 데이비스에 비해 어린 뮤지션들이던 그들이 영향을 더 받았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이들 중 허비 행콕과 칙 코리아는 이때 시작된 퓨젼에 대한 실험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퓨젼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둘의 관계는 조금 특이한데, 원래 밴드의 피아니스트였던 허비 행콕이 신혼 여행 중 예정일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아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해고된 후 칙 코리아가 영입됐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로 둘 사이는 밴드의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다. 1968년, 행콕은 자신의 그룹 결성을 위해 밴드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브라질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늦게 오는 바람에 쫒겨났다는 말들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일즈 데이비스의 자서전에는 당시 베이시스트였던 론 카터가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하기 싫다며 밴드를 나갔고 허비 행콕도 이미 Watermelon Man(1962) 앨범을 발표한 상태로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고 싶어했기에 새로 밴드를 만들어야 했었는데 이때 밴드의 드러머였던 토니 윌리엄스가 같은 보스턴 출신인 칙 코리아를 추천했다고 되어 있고, 과거 칙 코리아의 인터뷰를 보면 허비 행콕이 신혼여행을 가기 전 자신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밴드에 합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합류하게 됐다고 했다.

어쨌든, 두 거장은 서로 반목하는 사이가 아니라 평생을 걸쳐 연주 투어나 녹음 작업을 함께 하기도 하며 그 이름 자체가 쟝르가 될 정도로 성장했다. 허비 행콕의 최근 인터뷰에서 보듯이 두 거장은 서로 경쟁자라기보다는 동반자에 가까웠다.

"서로 존중했었고, 서로에게서 배움을 얻었다. 그러니 싫어하는 감정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었다(We all respected each other; we learned from each other. So there was never any kind of animosity.)"

"칙은 항상 장난기가 있었고 연주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애들같은 구석이 있어서 우리는 마치 모래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즐거움을 주고 받았다. 꼬마 둘이 노는 것처럼. 그런 것이 영감을 주고 고무적이었으며, 거기에 일말의 경쟁이라고는 없었다. 모든 것이 영감이었으니 나는 두 곳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내 자신, 또 하나는 칙 코리아에게서. 나는 칙도 똑같이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Chick was always playful; there was this kind of joy in his playing, and almost a childlike playfulness, like we’re playing in a sandbox, and it brought joy to me and then I would feed something and it would bring joy to him. We were like two kids. That was so inspiring and encouraging. There was never one hint of competition; it was all inspiration. So I could get inspiration from two [places]: I could get it from myself and from him. And I think he felt the same way."

재즈와 퓨젼이라는 시대의 변혁에서 메인스트림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퓨젼의 시대를 열며 시대를 앞서갔던 두 거장들의 영향은 정말로 크다. 현재의 퓨젼이라는 쟝르가 정착되기까지 수 많은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뮤져션들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절대 빠지지 않을 칙 코리아는 내게 있어 존경하는 선생님 같은 존재와도 같다.

칙 코리아는 1941년생, 한국 나이로는 81세임에도 아주 정정한 모습으로 최근까지 앨범과 투어를 다녔었고 한국에서 연주가 있을 때면 나도 대부분의 공연을 참관하기도 했었고 2014년 개리 버튼과의 서울 공연 때는 악수할 기회도 얻었다. 작년부터는 COVID-19사태를 맞아 투어를 멈추고 SNS나 유튜브 등을 통해 음악에 대한 설명이나 연주 방법 등 워크샵에 관한 내용을 거의 매일 활발하게 올리곤 했었다. 심지어는 이미 그래미 23개를 수상한 칙 코리아가 금번 2021 그래미 시상식(2021. 3. 14. 예정)에 2개 부문(Best Improvised Jazz Solo, Best Jazz Instrumental Album)에 후보로 올라있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내게는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활동이 뜸했든가, 건강에 평소 이상이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의 감정은 허비 행콕과 내가 유일하게 공유하게 된 감정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The news of Corea’s death hit me like a ton of bricks. I couldn’t believe it when somebody from Chick’s office called me a couple hours before they were going to make the public announcement about his death. I knew nothing. I don’t know anybody that did know he was ill." - 허비 행콕의 롤링 스톤지 기사 인터뷰(2021. 2. 16.자)

"칙의 사망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칙의 사무실에서 내게 전화로 몇 시간 뒤 그의 사망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아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글을 시작하며 우리는 살아 가면서 많은 것들의 팬이 된다고 했다. 특히 누군가의 팬이 되었을 때 그 누군가의 신상에 변동이 생기면 영향이 있다. 나는 살면서 유명인들 사망소식에 놀란 적은 있어도 충격을 먹은 적은 없다. 그러나 이번엔 좀 충격 먹었다. 불과 얼마전만 해도 세미나 영상을 활발하게 올리던 분인데 사망이라니! Instagram의 칙 코리아의 공식 계정을 통해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좀 울컥했다. 곁에 아내가 없었다면 눈물이 조금 났을지도 모를 정도다.

나는 칙 코리아의 음악을 안 듣는 날이 없다. 잘난 척 하려고 칙 코리아를 듣는다는 것도 아니고 감성 때문이다. 연주나 작편곡에서의 이론적인 부분은 제쳐 두고 감성이 맞는 것이다. 모든 곡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감정을 고양시키는 부분을 그의 음악에서 많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 Hal Galper라는 재즈 뮤지션의 말이 생각난다.
"여러분이 특정 아티스트에게 끌린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끌리는 그 아티스트와 여러분 사이에 어떤 공명이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제가 들은 예술에 대한 가장 멋진 정의들 중 하나는 예술은 전에는 몰랐던 자기자신의 무언가에 대해 가르쳐 주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When you are attracted to a particular artist, there's a reason for it. There's a resonance that's been created between you and that artist you respond emotionally and psychologically to the music. The reason is one of the greatest definitions of art I've ever heard is art is supposed to teach you something about yourself you didn't know before)."

 

위와 같은 이유가 내가 칙 코리아를 30년이 넘도록 거의 매일 질리지도 않고 주구장창 듣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더 많이 알아갈 수록 또 새롭게 들리는 음악들. 그래서 늘 새롭다.

 

그래서 알아이피 같은 것은 왠지 싸구려 인사같아서 할 수가 없다. 

앞으로도 계속 귀하게 들을 것이다.